장애신학 -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김홍덕 대장간)

 

 

 

장애신학은 장애를 매개체로 하나님과 그의 신민들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에 반해서 장애인 신학은 장애인들을 돕고 돌보는 사역의 느낌이 더 강하다.

 

하나님의 임마누엘적 존재하심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인식 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54)

하나님의 형상이란 부르심에 반응하는 아름다운 관계로서 하나님과의 전 인격적인 교제에 나타난 하나님 이미지라고도 볼 수 있다.(55)

즉 인생에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일일이 "왜"라고 묻지 말고 그 조건을 가지고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물으란 뜻이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는 것이니 어떠한 조건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낼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자는 것이다.(321)

물론 지금도 치유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장애를 그대로 가지고도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 영광의 분량은 똑같다.(324)

필요의 현장의 주인공은 필요를 받는 소외층이 아니라 공급하시는 주님이시다.(336)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고통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거해 주는 문제해결사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을 함께 당하시고 결국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십자가의 능력의 본질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언약의 갱신자로서, 구원자로서 자신의 지고의 사랑을 인간에게 보여 주셨다. 인간의 고통을 제거함으로서가 아니라 그 고통에 동참하는 방법을 택하신 것이다.... 그 고통은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탄생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부활은 고통을 흡수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체흘하심으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신 정점이다.(371)

십자가는 패러독스다. 십자가는 수치의 극치이자 영광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애도 수치의 극치이지만 십자가 안에만 있으면 영광의 절정이 된다. 십자가 그 자체로서는 도무지 무슨 능력이나 힘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절망과 수치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능력의 십자가가 되었다. 무능력이 능력이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실 때에도 수치의 초라함으로 오셨고 가실 떼도 십자가를 지심으로 수치로 가셨다. 그러나 수치는 영광의 또 다른 면이다.(371)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안고 사는 것이다. 따라서 안고 살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케 하는 것이 장애선교의 과제다. 더 나아가 자신의 장애 체험이 다른 사람의 눈물과 고통을 치유하는데 사용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극복하지 못할 고통을 영광으로 변환시키는 은혜의 장소다. 따라서 십자가가 능력이 되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고통과 장애를 없애거나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과 장애가 십자가의 능력에 의해 통치를 받기 때문에 다시는 고통과 장애가 삶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37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장애인 가족들에게 주는 실제적 위로의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십자가의 부끄러운 상처가 영광스러운 흔적으로 남은 것처럼 장애인들의 상처 역시 영광스러운 흔적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377)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어느 정도의 능력이 필요하지만, 하나님 아는 것은 꼭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 대해 아는 것은 지적활동을 요구하지만, 하나님 아는 것은 영적활동을 요구한다. 하나님 대해 아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지만, 하나님 아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이다. 따라서 지적장애인의 구원을 말할. 때 지적 능력을 말하기보다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416)

땅의 눈이 하늘의 눈으로 바뀜으로 인해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게 될 것이다. 이제 더는 땅의 시각으로 하늘의 존재를 말할 수 없게 것이다. 다시는 땅의 시각으로 하늘의 존재를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기준도 하늘나라의 기준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모습이 하늘나라에서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사실상 무의미하다.(453~4)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장애의 모습이 결코 하늘나라에서는 장애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이 세상에서의 장애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천국에 간다 해도 장애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도 되겠다. 따라서 이 땅에서 말하는 비정상의 기준이 하늘나라에서 이제 더는 비정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오늘 이미 천국의 삶을 사는 이 땅의 크리스천들이 장애인을 볼 때 비정상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455)